바디가 1480년대의 어느 시점에 적은 것으로 추정되는 《De Arte Gladiatoria Dimicandi》는 현재 두 종의 필사본이 전해집니다. 하나의 판본은 1482년에서 1487년 사이에 우르비노 공작 Guidobaldo da Montefeltro에게 헌정되었습니다. 이는 바디가 페라라를 떠난 뒤 공작을 섬겼을 가능성을 시사하나, 필리포 바디라는 이름의 사범이 실제로 우르비노 공작의 궁정에 소속되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. 나머지 하나의 필사본은 바티칸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지만, 그 스캔본이 디지털 플랫폼으로 공개되지 않았습니다.
바디가 남긴 무예서의 서문은 모범적입니다. 후원자에 대한 헌사, 자신을 가르친 사범들에 대한 표헌, 무예서를 작성한 이유, 이 기예를 익히는 데 중요한 덕목들, 독자들을 위한 충고,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작품에 대한 겸양으로 끝나는 흐름은 비록 정제되어 있지는 않아도, 다른 무예서의 훌륭한 서문들과 견줄 수 있습니다.
바디는 검술을 기예이자 과학이라고 생각했습니다. 이 관념은 우르비노 공작에 대한 헌사와 제 1장의 판결에서 드러납니다. 귀도우발도 다 몬테펠트로는 1482년에 10살의 나이로 우르비노 공작위를 물려받았습니다. 바디는 우르비노 공작을 포이보스와 뮤즈 여신들에게 속한 인물로 보았습니다. 무예서의 추정 작성 연도가 1483~1487년이니 십대의 공작에게 마르스와 미네르바에게 속한 덕목을 익히라고 충고하는 것은 꽤 파격적입니다.
검술을 과학이라고 부르는 용례가 언제 형성되었는지는 불확실하나, 바디에게는 꽤 어색한 용어 사용 같습니다. 제 1장에서 바디는 "검술은 기예가 아닌 과학"이라고 선언하나, 그 이후 과학이라는 단어의 사용 빈도는 급감하여 거의 기예만이 사용됩니다. 16세기 런던 방어의 사범들이나 이탈리아 지역의 사범들이 과학이라는 용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하기 전의 과도기적 시기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.
그가 직접 명시하지는 않았지만, 바디는 피오레의 필사본 중 하나인 MS Latin 11269에 영향을 받았습니다. 단적으로 중간에 삽입된 도해의 생김새가 매우 유사합니다. Leonello와 Borso는 모두 페라라의 변경백이었던 Niccolò III d’Este의 아들들이었고, Niccolò 3세는 피오레의 무예서 두 부를 소장하고 있었습니다. 만약 Este가와 필리포 바디의 연관성이 사실이라면, 이 경로로 바디가 피오레의 저술을 접했을 수 있습니다. 그러나 이것만으로 바디와 피오레가 같은 전통을 공유한다고 속단할 수는 없습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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귀도 우발도. 우르비노 공작.